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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6·마지막회]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4

이 농장 저 농장으로 방황 100번 이상 이사한 경우도 고국 그리도 가길 원했는데… 자식들 두고 갈 수 없어 포기 ▶농장 옮기다 이삿짐도 안 풀어 멕시코 이민들은 이 농장 저 농장으로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다. 작업 조건도 나빴고 임금도 낮았기 때문에 조금만 나은 곳이라면 그 농장으로 옮겼다. 그때 100번도 더 옮겼다고 얘기하는 동포들도 있었다. 뻔질나게 이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농장 많아요 유카단 반도에. 가서 석달도 있고 여섯달도 있고 여덟달도 있고두달도 있고…. 오래 있지 않아요. 또 조금만 틀리면 딴 농장으로 가고 조금만 틀리면 딴 농장으로 가고…. 어떻게나 많은 농장을 다녔는지 짐싸는 궤짝을 아예 예비해 놓으셨어요. 또 동아 매는 줄도 예비 해놓으시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셨어요." ▶이젠 아들 딸 때문에 고국 못가 비행기 한번 타면 돌아올 수 있는 최근의 미국 이민들도 고국을 그리워한다. 집밖에 나가면 10분도 못돼서 한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도 그들은 모국이 그리워우는 때가 많다. 하물며 초기 이민들이 고국에 돌아가기를 얼마나 원했느냐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LA에서 살고 있는 김 마리아 할머니의 얘기다. "우리 어머님부터도 밤낮 가시겠다고 밤낮 가시겠다고 하셨죠. 성님 한 분 계시고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가시겠다고 했는데 일본 사람들 때문에 못 가셨지요. 한국이 그렇게 된 뒤에 제가 시집을 갔고 또 동생도 시집을 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번에는 자식을 두고 갈 수가 없게 됐죠. 결국 못 가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내가 한국에 가서 물 한 그릇이라도 이렇게 떠먹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 밤낮 그렇게 원하셨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어떻게 해요." ▶조국 사랑 자식에게 말로 풀어 초기의 아메리카 이민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서러움을 자식들에게 말로 풀어 나갔다. 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면 모두 다 얘기 해줬다. 10번도 더 했고 20번도 더 했다. 그 동안에 많이 가꾸어져서 미화되기도 했지만 동화처럼 얘기해 줬다. 그래서 2세 동포들은 가 본 일도 없는 한국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얘기를 어떻게나 많이 들었는지 가본듯 해요. 밤낮 앉으시면 한국얘기 한국은 어떻고 어떻고…. 사는 얘기 잡수시는 얘기 과일이 어떻고 춥고 덥고 별얘기를 다하셔요. 그래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러시더군요 여기는 자식 기를 데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을 참 잘 시킨다. 그런데 여기는 자손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인종차별에 한인 짝짓기도 어려워 하와이 이민 2세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부모보다 더 서러움을 당했다. 부모들은 어차피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였다. 그래서 어떠한 서러움도 서러움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2세들은 모두 다 교육을 받은 훌륭한 성인이었으며 당당한 미국 시민권자였다. 그런데도 인종차별 때문에 직장을 갖지 못했다.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백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구나 한국인 2세 여자들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살고 있는 김수권 할아버지의 얘기다. "한국 양반들이 이민 올 때 부인 데리고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내가 23살 됐을 때 한국 처녀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여자하고 결혼을 하려면 말입니다 잘나기를 영화배우 같아야되고 부자이기를 백만 장자여야 되고…. 허지만 뭐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 한국 여자와는 얘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국 여자와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그러므로 간혹 흑인여자들과 함께 놀러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한평생 식당 운영 독립에 전력 다해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그들이 뭣 때문에 그처럼 애국적이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 그 때문에 서러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 가고 싶은 고국에 대한 생각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의 생활은 모두가 남을 위해서 살았던 것뿐이었다. 국가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를 위해서 그리고 내 동포를 위해서 살아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씨는 40년 동안을 그곳에서 식당을 경영해왔다. 지금 같으면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모두 남을 위해 썼다. "식당 사업을 40년을 했어요. 식당사업을 해야 한국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게되고 돈도 벌어야 독립운동에 쓸 수 있고 애국지사들이 오면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해방 후에는 군인들까지 한인 인사들에게는 무료로 서비스를 했어요. 또 유학생들이 뉴욕이나 시카고로 갈 때 그 사람들 영어 한마디 못할 때이니까 점심 도시락을 싸서 주면서 너희들 물만 먹어라. 차에 들어가면 커피 값이10전 또는 20전씩이다. 그러니 싸준 샌드위치에다 물만 마셔라. 그래도 죽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라 그렇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멕시코한인중 3백여명 쿠바 이주 멕시코로 떠났던 초기 이민들 중에서 상당수가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옮겼다. 몇 명이 갔느냐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3백여명이라는 것이 입으로 전해지는 숫자다.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있었던 초기 이민들보다는 훨씬 많은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쉽게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쿠바의 공산화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부분이 생활이 안정돼 소위 그들이 말하는 부르주아적 계급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 몇 명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한국계 동포들이 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김 마리아 할머니는 쿠바에서 왔다. 김 할머니도 쿠바의 한인들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쿠바에는 정신적인 안식처인 교회도 없었다고 얘기했다. "아이들더러 선생님들이 그럽니다. 하나님 뭐 어쩌고 그러면 하나님더러 달라고 그래라. 옷 달라고 하고 먹을 것 달라고 해라 어디 주나 봐라 그이는 안 준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 한테 달라면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너 공부도 시켜주고 그런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말자는 그 말이죠."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27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5]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 (3)

▶대 조선국민군단 창설 3백여 한인생도 참가 하와이에 우리의 군사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14년에 하와이에는 한국 사람들만을 생도로 하는 군사학교가 설립됐었다. 물론 교관도 교장도 한국사람이었다. 생도들도 무려 3백여명이나 됐었다. "박용만 이라는 사람이 미국 본토에서 왔었습니다. 그이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기 와서 군단을 조직했었습니다. 여기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가지고 말입니다. 한인들이 제일 막강했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 분이 큰 농장의 사탕수수밭을 맡아 가지고 한인들을 그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게 하고 일이 끝나면 나와서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고…. 그렇게 열심히 했었죠." 증언해 준 하와이 2세 동포인 당시 79살 김성수 할아버지의 얘기 가운데 박용만이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박용만의 국민군단 활동은 '조선 독립운동사'에도 기록돼 있다. ▶일하면서 훈련받고 이론까지 배워 '대 조선 국민군단'이라고 불리는 이 군단은 1914년 8월 29일에 창설돼서 1916년까지 계속됐다. 국민군단의 생도들은 들판에서 훈련을 했고 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그리고 교대로 사탕수수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 나가서 노동을 했다. 기록을 보면 카키색 군복을 입었고 목총을 어깨에 매고 행진했다고 돼 있다. 당시의 하와이군 사령부도 국민군단의 활동만은 묵인해 줬다. 박용만이 군대를 양성했던 것은 물론 독립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재를 양성해서 독립군 편성에 도움을 주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국민군단은 2년 뒤인 1916년 10월 이승만의 반대로 깨지고 말았다. 그때 대 조선 국민군단은 해산됐다. ▶초기이민 모두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아메리카 초기 이민들이 국가를 생각했던 것과 최근 이민들의 생각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 박대희 목사의 얘기다. "그 당시의 분들은 좀 단순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일편 단심이랄까… 나라를 잃어서는 안된다든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든지 정말 단순히 그 생각 밖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애국자들이 여기 많이 와서 그 지도자들이 그런 면으로 지도를 했습니다. 요새는 TV도 있고 영화도 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 세상의 잡념을 가져다가 넣어 줄 만한 것들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고 그 대신 그런 연사들이 조국애를 부르짖고 말이죠…. 그러니깐 자기네들이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으면서도 다 돈들을 내서 애국운동들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하고 지금하고 사람들이 좀 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돼요. 우선 저부터도 그렇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많이 배워서 너무 알고 그러기 때문에 좀 이기적이 된 것 같아요." ▶1948년 하와이서 한인 라디오 시작 1977년 당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는 24시간 한국어로 방송되는 KBC(대표 서정자.관련기사 14면 )라는 한국어 방송이 있었다.특수 채널을 통한 방송이어서 특별히 제작된 라디오가 있어야만 청취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모든 프로그램을 한국어로 방송한 최초의 한인 방송이었다. 당시 우리 이민들은 AM과 FM등 미국의 방송회사들로부터 1시간 혹은 2시간씩을 빌려서 방송을 해왔다. 이런 방송은 한국인이 많이 모인 곳이면 어느 곳이건 대부분 있었다.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이런 식으로 방송을 시작한 곳이 하와이다. 1948년 2월13일 오후 3시30분에 첫 방송이 나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포 방송계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일해왔던 전 하와이대학교 이상억 교수로부터 당시의 얘기를 들어본다. "동리마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여 가지고 방송이 오후 3시 반에 나오는데 아침부터 와서 라디오를 틀어 놓고 아들 딸들에게 다이얼을 맞춰달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점심을 다 같이 해 잡수고 그리고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또 6.25때는 전쟁의 참혹한 상황을 제가 한국말로 보도 할 때에 그 분들이 눈물을 흘려 가면서 듣고 그리고 앞길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함께 걱정하곤 했습니다." 이교수가 직접 진행했던 이 방송은 일주일에 단 한차례 30분 짜리 방송이었다. 그 주간의 뉴스와 2-3개의 음악 한국어 교실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람이 있을 경우 인터뷰도 포함시켰다. 이 방송은 그 뒤 10년 동안 계속됐다. 이 교수는 30분짜리 한번 방송에 36달러를 송출료로 냈다고 밝혔다. 지금이야 36달러는 돈이 아닐 정도이지만 당시는 큰돈이었고 결국은 그 돈이 마련되지 않아 중단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2차 대전 때 한인 중엔 일본인 감시 임무도 2차 대전 중에 미국에 있는 일본 이민들은 적국의 국민 취급을 받았다. 집단 수용을 당했고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김성수 할아버지는 그때 자기에게 일본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특권이 부여됐었다고 얘기했다. "나부터도 농장에 있었지만 마치 정탐꾼 모양으로 표를 만들어 주고 일본사람들의 집집을 댕기면서 뭐하나 알아보고 또 검사해 보라고 내게 아주 권리를 주었었습니다. 농장에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너희 아들딸은 우리농장 태생이니 우리 노예다" 1905년 멕시코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은 4년 기간의 노동계약을 체결했었다. 4년 뒤에는 충분한 돈을 받고 다시 배에 태워서 되돌려 보내기로 돼 있었다. 물론 돈도 받지 못했고 돌아갈 배도 내주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09년에 한인들의 노동계약이 다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이제는 돈을 달라. 그렇지만 완전히 우리 나라의 국권이 상실되고 일본 사람들의 속국으로 있게 되니까 결국은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하고 또 심지어 어떤 농장주인들은 너희들의 자녀는 우리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 낳았으니까 우리의 노예다. 그러니 아이들은 놔두고 너희들은 몸만 나가라. 이런 비인도적인 그런 농장주인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우상범 목사의 설명이다. 우 목사의 얘기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고 또 공인될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25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4] 이민생활에 얽힌 얘기들 (2)

▶'통변'되면 일도 않고 특별대우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고통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비록 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했다. 알아듣질 못해서 엉뚱한 일을 했고 그 때문에 채찍질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맞은 사람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일을 시켜야만했던 농장주인들의 입장에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당시에는 통역하는 사람을 '통변'이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옹의 얘기다. "누가 영어를 좀 할 수 있는가 하고 찾았어요. 그 가운데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을 지정해서 통역을 하도록 하지요. 그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자유롭게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불러다가 농장주인과 한인들 사이의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통역으로 한몫을 한 셈이죠." 통변에 얽힌 얘기는 많다. 어떤 통변은 농장주인의 편에 서서 초기 이민들을 괴롭힌 일도 있었다. 어떤 통변은 농장주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욕설부터 알려 준 사람도 있었다. 멕시코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나가서 점호를 하는데 자기는 안 나가고 있으니까 점호를 해보니 당연히 한사람이 없었겠죠. 멕시코인 관리자가 누가 안 나왔냐? 하니까 아무개가 안나왔다고 대답을 했고 이어 왜 안 나왔느냐? 고 물었지만 별 이유가 있을 리 없죠. 그러자 잡아와라 그래서 숙소에 가서 붙잡아 가지고 옷까지 벗긴 다음에 전체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물론 때리려고 말입니다. 그 사람은 맞을 것을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청을 돋구어 '때리기만 하면 너죽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통역하는 사람더러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고 물었고 통역은 사실 그대로 만일에 때리면 너를 죽이겠다고 그랬다고 했더니 겁이 났던지 때리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잔돈 셀줄 몰라 모두 꺼내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년 정도만 지나면 대략이지만 일하는 요령을 알게 된다. 그리고 쉽게 그 방면의 언어도 구사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장밖에 나가면 아무것도 통하질 않았다. 그들은 생활의 기초인 숫자 마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많은 손해를 봤다. "아버지는 일 가시고 어머니는 식료품을 사야겠는데 말을 모르시니까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손짓으로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그렇게 살 수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방도가 없죠. 한번은 달걀을 사야겠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거기에는 없어서 서성대니까 그 사람들이 뭐냐고 자꾸 자꾸 묻더래요. 할 수 없이 닭모습을 하면서 '꼬끼오~'했더니 그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주더래요. 고생 많이 하셨어요 말을 못해서…. 돈을 줄 때도 가진 돈을 모두 꺼내 놓으면 더 받는지 덜 받는지 그것도 모르고 남으면 도로 가져가시고 안 남으면 그것이 다 내가 물건을 산 것이려니 생각하고는 그냥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돈도 많이 잃어 버렸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다 착한 사람들만은 아니었을테니 말입니다." ▶13살 소녀 나이 속여 사진 결혼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이 사진 결혼을 했다는 얘기를 한 일이 있다. 당시에 사진 결혼으로 들어간 신부들의 나이는 20살 안팎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3살의 나이로 결혼하겠다고 나선 꼬마 아가씨가 있었다. 이민국에서 허가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꼬마 아가씨는 통과됐다. 그분이 바로 자기 어머니였다고 77년 당시 65살 제인 이 할머니가 소개한다. "우리 어머니가 13살 때 시집을 왔어요. 배에서 내리는데 13살이면 안된다고 해서 16살이라고 거짓말을 하셨대요. 우리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는 20살 차이였습니다." 33살의 노총각이 13살의 꼬마 신부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못한 홀아비들이 하와이 농장에는 많았다. 신부를 데려오는데 필요한 2백달러가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미국정부의 금지조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쉽사리 미국으로 이민오겠다는 신부가 많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남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장가를 들었는데 홀아비로 한평생을 지내야만 했던 그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했을 것이다. ▶늙은 신랑 죽으면 신부는 내 차지! 사진 혼인으로 미국에 건너온 이순도 할머니의 얘기다. "독신생활 하는 사람들은 일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없죠. 그렇게 할 일없는 독신자들이 풀밭에 죽 늘어앉아서 하는 얘기가 그것이예요. 우리가 사진혼인을 하려고 애쓸 것 없이 한 10년 있으면 저 사람들 다 죽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자연히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나는 그랬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거울이 없으면 물이라도 떠놓고 자기 얼굴들이나 쳐다보시지. 자기들은 늙지 않고 죽지 않겠는가?" 나이 많은 신랑이 죽으면 젊은 신부는 내가 차지하겠다는 얘기는 정말 익살스런 표현이다. '익살스럽다'는 것은 그들에게 애정에 얽힌 탈선이 없었다는 데서 연유된다. 아메리카 이민사회에서 홀아비와 유부녀가 탈선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1세나 2세 동포들도 그 점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돈 안 보낸다' … 한국과 소식 끊겨 하와이나 멕시코의 농장에서 노동을 했던 초기 이민들이 본국과 전혀 단절된 상태에서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성경과 찬송가는 본국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었다. 1세들 중에는 신문이나 잡지등 간행물도 받았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다. 멕시코의 어떤 동포 2세는 큰아버지로부터 귀국하라는 편지와 돈까지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도 있다. 어저귀 밭에서 노예와 같은 중노동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서 못 돌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 달라는 편지가 있었다. 멕시코 티후아나에 살고 있었던 현오목 할머니의 회고다. "우리 아버지가 가난해서 양복 하나가 없어서 사위의 옷을 빌려서 입으시고 그리고 아이들 옷을 하나씩 해서 입힌 뒤에 식구 전체가 사진을 찍었어요. 그 사진 여태 있습니다. 그 사진을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냈더니 잘 사는 줄 알고 돈을 보내라고 그랬대요. 그래 기가 막혀서 우리도 먹고 살 수가 없는데 무슨 돈을 보내겠느냐고 편지를 했더니 돈을 안 보냈다고 그 뒤부터는 연락을 해오지 않아 연락이 끊겼습니다." 현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돌아가셨다. 지금까지 편지가 없다. 돌아가셨는지는 모르지만 한국 어딘가에 현 할머니의 사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서로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을 것이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20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3] 생활에 얽힌 얘기들 (1)

▶김치단지 버려라 '채찍질'도 언제부터 한국사람들이 김치를 담아 먹었느냐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김치는 기원전 700년인 중국의 주나라 문왕 때로 되어 있다. 그래서 김치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봉유설'에는 김치의 주재료인 고추가 조선 선조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적혀있다. 이조 때부터 김치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 자료다. 고추 못지 않게 중요한 소금이 흔하게 사용됐던 것은 고려 때부터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백김치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김치와 한국인은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한끼만 김치를 걸러도 개운치 않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비록 밥은 못 먹을 망정 김치는 먹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외국 여행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도 김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시기야 어떻든 초기 아메리카의 한국인들도 김치를 즐겨 먹었다. 그리고 김치 때문에 많은 수난을 겪었다. ▶냄새 원흉 찾아 집안 강제 수색 하와이의 조태룡씨의 얘기다. "배추를 심어서 자기들이 김치를 담가 먹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아시다시피 먹는 우리는 모르지만 김치 냄새가 굉장히 나거든요. 그런데 감독관들이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막사를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며 점검을 했다고 그래요. 군대 생활하고 똑같죠. 일주일에 한번씩 청소도 해야 되고 검열도 받아야 되고…. 이러다가 보니까 와보면 이상스런 냄새가 나거든요. 이것이 무슨 냄새냐고 물으면 쉬쉬하고 아무도 얘기도 안 하고 그랬는데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고약하니까 나중에는 집안을 다 뒤지고 강제 수색을 했지요. 그래 가지고 김치 단지가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죠. 그 다음에 그들은 일단 김치 단지를 버리고 난 다음에 벌을 주고 채찍질까지 하고…. 그렇다고 해서 안 먹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냄새가 안 나게 봉하고 또 봉하고 해서 감추어 두었다가 먹다 들키면 그 야단을 맞으면서도 김치를 먹었죠."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초기 이민들은 김치를 먹었다. 김치뿐만 아니라 젓갈까지도 만들어 먹었다. 행여 그 냄새가 밖에 새어 나가지 않을까 해서 싸고 또 쌌다. 김치 냄새만큼이나 지독하게 김치를 지켜 온 셈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는 2세 동포 김 마리아 할머니의 설명이다. "이 냄새가 무슨 냄새냐?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이웃집 사람들이 그래요. 알죠 우리는 그것 때문에 냄새가 난다는 것을. 그래서 어머니가 젓갈이나 김치 같은 것을 만드실 때는 문을 꽉 잠그시고 그걸 만드셨죠. 또 옆에 사람들이 많을 때는 그런 것을 못 잡수어요. 괜히 그 사람한테 망신을 당한다고…." ▶멕시코서는 선인장 김치 담아 아메리카 대륙에는 소위 조선 배추가 없었다. 양배추라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양배추로 담을 수도 있었지만 걸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초기 이민들은 그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와서 배추를 재배했던 일본 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한테서 샀다. 그러나 멕시코의 초기 이민들은 처음엔 그것마저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김치를 담갔다. 티후아나의 김경우씨의 얘기다. "멕시코에 처음 왔을 때 배추니 무 그런 것들이 거의 없었고 눈에 띄지를 않았다고 그래요. 그러나 김치는 먹고 싶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살면서 김치를 만들어 먹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멕시코에는 선인장 종류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멕시코 사람들이 식품으로 개발한 선인장이 있어요. 그 식품으로 개발한 선인장을 잘라서 김치를 담가 먹었다고 합니다. 저도 못 먹어 봤으니까 모릅니다만 맛이야 달랐겠지만 조금 비슷했겠죠. 그렇게라도 해서 먹어야 했던 그 당시 그 사람들의 생활이 안타까울 뿐이죠."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김치만 만들어 먹은 것은 아니다. 고추장 된장 간장까지도 만들어서 먹었다. 메주콩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다. 아메리카대륙에는 조그맣고 새하얀 콩이 있다. 본 일도 없고 들은 일도 없는 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면 족했다. 그 콩으로 메주도 만들고 그것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만들었다. ▶된장 간장 젓갈 묵까지 만들어 김 마리아 할머니의 얘기 다시 들어본다. "김치 고추장 된장 젓갈 한국에서 먹었던 것은 모두 다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묵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거기에 물론 한국 식품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집집에서 각각 만들어서 먹었죠. 냉국 그것도 먹었습니다. 냉국 아시죠?" 김 마리아 할머니는 지금껏 한국에 와 본 일도 없는 동포 2세다. 그런데도 그 집 냉장고에는 항상 김치 통이 마련돼 있다. ▶'건더기'는 저희들이 먹고 우리는 물만 준다 1900년대 초 서울에는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러시아 등 각국의 대사관들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많은 서양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커피를 가지고 와서 마셨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로 떠난 초기 이민들이 커피를 알았을 리 없다. 멕시코에서는 이 커피 때문에 생긴 웃어야 할 일화가 있다. 로스앤젤레스 우상범 목사의 얘기다. "멕시코 농장주인들이 아침에 커피를 끓여주는데 커피를 끓이면 물은 다 위에 있고 갈아 넣은 커피는 가라앉지 않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물만 떠 주니까 한국 분들이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말로 하면 '건더기'는 저희들이 다 먹고 우리는 물만 줄 수가 있느냐? 그런 불평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러면 이 건더기를 먹어 보아라. 그래서 먹었는데 써서 못 먹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다. 멕시코에서는 당시에 소의 내장을 먹지 않고 버렸다. 한국사람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 충분한 식사가 공급되지도 않았던 때였다. 멕시코 시티의 최병덕씨의 설명이다. "그때 소를 잡는데 말이죠. 창자를 모두 버렸습니다. 창자 뿐만 아니라 머리 발꼬리 같은 것을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한인 부인들이 이것을 보고 서로 주워 가려다가 다투었다고 해요. 내가 먼저 왔다 네가 먼저 왔다 해 가지고 말입니다. 그것을 소잡는 사람이 보고 칼을 가지고 와서 절반을 잘랐대요. 둘이면 둘 셋이면 셋씩 잘라서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멕시코에서도 소의 내장이나 머리 발 꼬리부분이 버려지지 않고 팔리고 있다. 어떤 동포는 그것이 바로 우리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koreadaily.com

2011-04-18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2] 티후아나 한인회2

▶1천여 한인 … 순수 한국계 50가족 당시 멕시코의 티후아나에는 1천 여명 한국계 동포들이 살고 있다. 이 중에서 순수한 한국 혈통을 지닌 사람들은 50여 가족 정도이다. 그들은 비록 한국어를 모르고 풍습을 모르지만 가능한 한 한국의 피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이유로 한인회 회원들은 일가이고 친척들이다. 박성철 관장의 얘기다. "교민회에 가서 보면 서로들 일가 친척이 안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로 보면 중혼 비슷한 것입니다만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당숙이라고도 하고 처남도 되고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교민회는 가족끼리 연대 관계가 잘 맺어졌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느 다른 교민회보다도 가장 잘 조직이 되고 또 가장 잘 움직여지고 있는 교민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 티후아나 한인회원 중에서 한국을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은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한국을 알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얘기들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멕시코에서 나서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까지 광복절과 3.1절 때면 잊지 않고 기념식을 갖는다. ▶한국말 못해도 광복절삼일절행사 티후아나 강정부씨의 얘기다. "한국에서 하는 모든 주요 행사는 이곳 교민회관에서 함께 치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3.1절 행사. 3.1절 행사는 특히 이 양반들이 오게 된 동기가 일본사람들에게 한국이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왔다는 이유로 3.1절 행사와 광복절 행사가 큽니다. 여기서는 광복절 이라는 이름보다는 8월15일이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절을 스페인어로 〈팔월 십오일> 이라고 그대로 풀어씁니다. 삼일절도 그렇고요." 티후아나의 한인회는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모인다. 매월 첫 번째 화요일과 세 번째 화요일에 모인다. ▶한달 2회 노인 어린이 모두 모여 베드로 디아스씨의 얘기다. "우리는 한 달에 두 번씩 모입니다. 모이면 지난 일들을 얘기하고 잘못된 일들이 있으면 수정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도 토의합니다. 그리고 재미있게 놀기도 합니다. 노인과 젊은이 그리고 어린이까지 모입니다. 대개 한국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하자면 친목단체입니다." 어느 단체이건 모이기 위해서는 회비라는 것을 내기 마련이다. 어떤 단체는 회비를 내는 것이 부담이 돼서 회원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티후아나의 한인회는 그 점에서도 다르다. 한인회장 마누엘씨의 얘기다. "우리의 수입원은 회비와 교민회관을 빌려준 임대료입니다. 회관에서는 생일파티나 결혼 등 각종행사를 합니다. 이 임대료에서 보충하고 있습니다." ▶무대와 조명 갖춘 회관 임대 운영 티후아나에 있는 한인회관은 200여 평의 넓은 홀을 가진 단층건물이다. 무대도 있고 조명장치도 돼있다. 그리고 사무실이 독립돼 있고 한쪽에는 파티를 할 때 필요한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취사장도 마련돼 있다. 당시 티후아나시에서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그런 회관이라면 일류급이다. 결혼식이나 파티를 할 때면 임대료를 한번 사용에 2백 70달러 우리 돈으로 13만5천원(1977년 당시)을 받는다. 한국계 동포들이 회관을 사용할 때는 훨씬 싼 값인 55달러 우리 돈으로 2만 7천 500원을 받고 있다. 그 돈은 물론 한인회를 운영하는 데 쓰여진다. 이들이 회비를 내는 것도 한국식의 회비와는 다르다. ▶회비는 형편대로 직접 정해 납부 김경우씨의 얘기다. "한인회를 운영하는데 회비를 지원해서 내게 돼있습니다. 자기 형편대로 자기가 얼마를 내겠다 하면 그것이 자기가 내는 금액이 돼 가지고 매달 그 액수를 내면 됩니다." 티후아나의 한국인들은 한국을 모른다. 그들에게 한국은 너무도 먼 나라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다녀 온다해도 20여 시간이 걸린다. 한국에 관한 책자가 필요해도 쉽게 구하기 힘들다. 멕시코의 한국대사관에서는 가끔 그들에게 영화필름을 보내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언젠가 한번은 그곳에 가 보고 싶은 것이다. 엄마에게 어렸을 때 들었던 한국을 가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에 가보는 것을 그들의 숙제로 남겨두고 있다. 마누엘 회장의 설명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한국에 대해서 굉장히 모릅니다. 그래서 저 뿐 아니라 모든 동포 회원들이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대사관에서 책자도 보내줍니다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기록영화를 봐서 한국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나 동포회원들은 한국에 가길 원합니다." ▶연고자 없지만 모국모습 보고파 내년(1978년) 그들은 어쩌면 한국에 올지 모른다. 기자가 그곳을 떠날 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내년에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했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줄 친척이나 친구는 없지만 가야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살았던 고향의 동네 이름도 모르지만 한번 가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동포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티후아나 한국인들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한국국민과 한국정부에 감사를 드립니다. 멀리서 안부를 전합니다" (한인회 초대회장이었고 지금은 명예회장인 베드로 디아스 코로나씨) "한국에 있는 같은 동포 여러분들에게 여기 모든 사람들이 안부를 전합니다. 개인적으로 직접 한국에 가서 보기를 원합니다." (티후아나 한인회장 마누엘 에스끼벌 굿띠에레스씨)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단체를 만든다. 그래서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단체를 만든다. 그들 단체는 없어지질 않는다. 오히려 2개로 혹은 3개로 갈라진다. 그래서 또 많아진다. 한인회. 한인회는 어디를 가도 말썽이다. 이유야 어떻든 반가운 일은 아니다. 티후아나의 한인회를 소개하면서 이런 단체는 많아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널리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13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1] 티후아나의 한인들1

◆멕시코 유일의 한인 단체, 티후아나 한인회 “티후아나 한인회가 잘 돼가고 있다는 얘기를 제가 직접 한다는 것은 조금 우습습니다. 이곳의 한인회는 1966년에 설립된 단체입니다. 티후아나시에 한인회와 같은 성격의 단체가 10여 개가 있지만 시나 주 정부에 우리처럼 인정을 받고 있는 단체는 없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회관을 단독으로 갖고 있는 교민회는 이스라엘과 한국 뿐입니다. 이 얘기가 모든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에 한인회가 있다. 이 한인회에 순수한 멕시코 사람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인의 피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연이어 두 번을 회장으로 당선돼 훌륭하게 한인회장 일을 해내고 있다. 그는 한번 더 회장이 될지도 모른다. ◆한인 핏줄 아닌 순수한 멕시코인이 한인회장 그게 무슨 한인회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티후아나 한인회' 라는 이름으로 티후아나시에 정식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인회관까지 가지고 있다. 회관 앞면에는 한글로 '티후아나 한인회'라고 선명하게 써있다. 태극기와 멕시코 국기가 나란히 게양돼 있다. 어느 날이 되면 10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서 서로 얘기하고 웃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다 멕시코의 국어인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그래도 그들은 한인회원이라고 말함은 물론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한인 피 나눈 '김'씨와 '이'씨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다른 나라의 교민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교민들은 대개가 한국에서 직접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사는 중에 조직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한국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그런 교민회이고 여기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기 보다는 여기서 나서 여기서 자란 후손들이 모여서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의 풍속도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름이 '김'이고 '이'이고 그래서 자기 조상들이 한국사람들이었다는 그것만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사람들은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부 이고 그것이 바로 다른 나라의 교민회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이곳 티후아나 한인회가 유일한 한인 단체다. 1905년에 멕시코로 건너가서 어저귀(에네켄) 밭에서 눈물로 한평생을 보낸 초기 이민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이다. 그들의 조상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국이었지만 끝내 가질 못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조국을 가르쳤다. ◆한인 모두가 일가이자 친척 수십 년이 흘러서 벌써 3세, 4세, 5세까지 이르게 됐다. 그 동안에 멕시코의 피가 많이 섞였다. 순수한 한국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도 그들은 조국을 잊지않고 있다. 그래서 한인회를 만들었다. 조국의 피가 섞여 있으면 누구든 회원이 될 수가 있다. 남편이 한국인이고 부인이 멕시코인이면 부인도 회원이 된다. 또 부인이 한국인이면 남편도 회원이 된다. 지금 6대 회장인 마누엘 에스끼벌 굿띠에레스씨도 부인이 한국인이다. 그래서 회원이 됐고 회장이 됐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의 한인회와는 다른데가 있다. 당시 대한 무역 진흥공사 멕시코 관장이었던 박성철씨의 설명이다. “물론 첫째가 친목입니다만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 그리고 경제적인 요소가 가미되고 또한 그 자체 내에서 분파 작용이 상당히 심합니다만 이곳 티후아나 한인들의 모임을 보면 한국말을 모르고 우리 나라에 가보지 않은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나라에 대한 열의가 그런 정치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을 떠나서 가장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하나의 예를 그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순수 혈통지키려 한국서 양자 데려와 '피는 물보다는 짙다'는 표현을 우리는 너무 흔하게 써왔던 것 같다. 우리는 그 말을 아전인수격으로 쓰는 때가 있다. 무관심했던 친척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아쉬울 때면 '물보다 진한 피'를 찾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순수한 한국인 혈통의 3세이고 초대 티후아나 한인회장이었던 베드로 디아스 코로나씨의 경우다.(한국이름은 김상영씨인데 할아버지가 있을 때 그분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 성장한 뒤 거의 한번도 불려지지 않았다는 것) “내 부모들이 순수한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아내도 순수한 한국사람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아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양자를 얻으려고 1966년에 한국에 갔었다. 2명의 양자를 데려왔는데 그때부터 나는 더 조국에 가까워졌다.” 멕시코에도 양자로 삼을 애들은 많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한국 어린이를 원했다. 그래서 한국에까지 왔다. 하나는 아들, 하나는 딸. 두 어린이가 지금 멕시코에서 친부모와 다름없이 따뜻하게 보살피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양부모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마누엘씨는 순수한 멕시코인이면서도 티후아나의 한인회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다고 말한다. “우선 나는 한국 여자의 남편이고 회장이 되기 전에도 한국 사람들과 같이 어울렸다. 운동경기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나는 회원이다. 회칙에도 회장이 꼭 순수한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다수에 의해서 선출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모든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회장직을 맡았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11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20] 멕시코 초기이민자 생활 2

▶탈출하다 붙잡히면 채찍질 채찍으로 맞아 피가 흘렀다. 그리고 1주일 동안을 움막에 갇혀야만 했다. "하루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이 몰래 도망을 해 나가지 않았겠어요. 그 이튿날 한인들을 모두 불러다가 점고(점호)를 합디다. 세워 놓고 몇 명인지 도망갔나 안 갔나 그걸 보려고. 그런데 없지요. 도망했으니까. 전화를 합디다 그려. 붙들어 오라고. 찾아가지고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그래가지고 가뒀습니다 그려. 가두었다가 그 이튿날 꺼내다가 채찍으로 치는데 채찍을 물에다 불려 놓았다가 그걸로 치는데 엎어놓고 바지를 벗기고 치니 피가 툭툭 터져 나오죠. 그리고는 가두었어요. 한 주일 동안을 가두더니 그 다음에 꺼내 주었어요." 4년이 지난 뒤 멕시코 이민들은 노예 노동에서 풀려났다. 그래서 귀국하려고 했다. 당초 계약 조건은 4년뒤에는 고국으로 보내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다. 하와이의 동포들은 한일 합방소식을 듣고 주저앉았지만 멕시코의 이민들은 그래도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가진 것이 없었다. 하와이 이민들이 하루 69센트를 받고 있을 때 그들은 하루에 겨우 25센트씩 받았었다. 그래서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 했다. ▶ 한 사람도 귀국 못해 "한국 나가기 그렇게 원하셨는데 못 나가셨어요. 돈이 없어서…." "뭘 가지고 갑니까? 뭘 가지고 가요? 벌이가 변변해야지요. 갈 맘이야 다 있었지요…." 멕시코의 한인들은 노동계약 기간이 끝나는 4년뒤에 어떤 일이 있어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멕시코말을 배운 사람도 없었다. 그 나라의 풍습을 익힌 사람도 없었다. 그저 돌아가는 것만이 꿈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 하든 먹고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뭘 할지를 몰랐다. 도대체 그들은 멕시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다시 농장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병덕씨의 얘기다. "풍속도 모르고 이 나라 법률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은 분들은 그저 어저귀(에네켄)를 따고 있었죠. 나부터도 그때 어저귀를 따고 있었습니다. 8살 때부터 어저귀를 땄으니까…." 자유로 노동할 수 있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멕시코는 그 당시에도 너무 싼 임금이었다. 몇 년을 일해도 목돈 한번 만져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몇 사람이 도시로 떠났다. ▶도시진출 꿈 … 돈없어 포기 "그렇게 이 농장 저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오랜 세월동안 일을 하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메리다라는 도시가 있는데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가지고 도시로 나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 둘씩 도시로 나와서 살았는데 상업을 해야 할텐데 기반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어렵게 살았었죠. 그러다 보니 또 다른 도시로 가보자 그래서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는 과정이 또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농장에 와서 노동을 하고 또 누군가가 다시 도시로 나갔고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생활을 해왔다. 농장에서 꾸준히 있었던 사람들도 한 농장에만 있지는 않았다. 한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농장을 옮겼다. 그곳이 나쁘면 또 옮겼다. 그렇다고 돈을 더 벌었던 것은 아니다. ▶김치 먹으려 3~4년 돈 모아 현오목 할머니는 당시 김치거리 하나를 살려해도 몇년동안 돈을 모아야 했다고 얘기한다. "그때 대도시인 메리다로 나와야만 김치거리를 사는데 메리다에 나올 돈도 없어요. 2-3년 정도의 기간이 지나야 메리다로 나올 수 있었어요. 비로소…. 어떤 때는 4년만에 나와요. 돈 몇 푼 모아 가지고…. 그러면 그때 김치 거리를 좀 사셨죠." 몇 년만에 한번씩 겨우 김치다운 김치를 먹었다는 얘기는 정말 가슴아픈 얘기다. 멕시코 이민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옮기려고 했다. 미국에 있는 초기 이민들도 멕시코의 한국인들이 자기들보다도 못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중에도 멕시코 한인들의 미국 이주를 위해 필요한 경비 1만 2천 달러를 모금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이 일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멕시코 이민들은 시기적으로도 불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가난을 벗지 못했다. 이 농장에서 저 농장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방황해야만 했다. 그 기간은 40여 년이나 됐다. 그 사이에 일부는 쿠바의 설탕농장으로 옮겨갔다. 그 후 어떤 사람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도시인 티후아나로 왔다. 그 사람이 그곳에서 돈을 벌었다. 그는 농장의 한국사람들을 불러들였다. ▶티후아나 정착 현재 1천여 동포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처음에 이곳에 오신 분이 구멍가게처럼 식료품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구멍가게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만 그 구멍가게를 만든 다음에 처음에는 조금씩 외상으로 얻어다가 판 뒤에 돈을 갖다 주고 또 얻어다가 갚아주고 그런 식으로 한 3년 하니까 돈이 불어나서 제법 가게가 커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뒤에 온 사람도 역시 식료품상을 했고 또 그 뒤에 온 사람도 식료품상을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식료품상을 해나가다가 이제 자본이 조금 되니까 다른 것으로 바꿔서 지금은 여러 종류의 다른 사업들을 많이 하고 있죠." 지금 멕시코의 티후아나에는 1천 여명의 한국계 동포들이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3세 4세들이다. 1세는 당시 95살 김은순 할머니 한 분이 있을 뿐 전부가 세상을 떠났다. 어저귀 밭의 노예노동과 가난과 서러움에 시달렸던 그들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와이 초기 이민들처럼 사진혼인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혼혈이 많다. 그보다는 이미 멕시코 사람이 다 돼버렸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06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9] 멕시코 초기이민 농장생활

◇1천명 화물선에 실려 멕시코로 1905년 4월2일 1033명의 한국인을 태운 영국배 한 척이 인천항을 떠났다. 엘 보트(El Boat)호로 알려진 이 배는 1천여 명의 승객을 태웠지만 여객선 아닌 화물선 이었다. 그래서 선실이라는 것이 없었다. 짐을 실었던 몇 개의 창고에 나뉘어져 사람들은 실렸다. 화물선에 1천여 명의 사람들이 탔으니 식사가 변변할 리도 없었다. 이런 항해는 한달 보름동안 계속됐다. 그 동안에 2명의 어린이가 죽었다. 선원들 풍습대로 바닷물에 던져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선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심리적인 동요를 막기 위해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이 배가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살리나 쿠르스 항이었다. 그 배에 탔던 한국인들은 그곳이 바로 하와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아서 멕시코로 온 것이다. 1031명 이들이 멕시코로 건너간 한국의 이민들이다. ◇대한제국도 멕시코이민 몰라 멕시코의 이민은 불법이었다. 그들이 떠날 때 소지했던 여권은 일련 번호가 없었다. 필요한 몇 개의 도장도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멕시코로 건너갔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정부(당시 대한제국)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무렵에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살고 있던 초기이민들도 멕시코에 한국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어떤 사람(인삼장수 박영순)이 장사일 때문에 멕시코에 갔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한국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확인한 그는 이 소식을 미국의 한인단체에게 전달했다. ◇한인 인삼장수 확인으로 알려져 우상범 목사. 우 목사는 멕시코의 한인들을 위해 6년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해 왔다. LA한인 연합장로교회에서 시무 했던 우상범 목사의 설명이다.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지방에 한국동포들이 많이 와서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들려서 그때 미국에 있는 국민회에서 황사영씨로 기억되는데 그분하고 또한 분을 실제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 '인삼장수가 말한 사실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들이 멕시코에 와서 실제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다 조사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에 국민회에 보고함으로 인해서 이제 세계에 알려졌고 우리 나라 정부에서도 알게됐어요." 우상범 목사는 1967년 멕시코로 건너가 바로 그분들을 위해 그곳에서 6년동안 선교 활동을 했던 분이다. 멕시코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은 '어저귀(에네켄)' 밭에서 일을했다. 한글 대사전에 어저귀는 아욱과에 속하는 1년초 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줄기와 껍질은 섬유로 쓰여진다고 돼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어저귀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멕시코에서도 유카탄 지방에서 만 자라고 있는 이 식물은 용설란과 비슷하다. 멕시코 이민들이 노동을 했던 유카탄 반도의 원주민인 마야인들은 이 식물을 '병가'라고 부르고 있고 멕시코 인들은 '에네켄'이라고 말한다. 어저귀라고 우리 이민들이 이름을 붙였던 것은 섬유로 쓰여 진다는 공통점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어저귀는 '마닐라 삼'과 같이 마대나 선박의 로프를 만드는데 쓰여진다. 티우아나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식물인데 그 잎이 1미터50에서 2미터 가량 길고 넓이가 30-40센티 정도로 위를 향해서 쭉쭉 뻗어 있는데 그것을 잘라냅니다. 잘라낸 다음에 양편으로 톱니같이 붙어 있는 큰 가시를 때어내서 다듬어서 다발로 묶어서 구루마에 실어서 섬유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는데 바로 그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에네켄에 한을 묻은 한인들 멕시코 이민들의 서러움은 바로 이 에네켄에 있다. 에네켄에는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크기가 4-5 센티나 되는 가시가 있다. 유카탄 반도는 열대성 기후여서 웃옷을 입을 날씨가 아니다. 어저귀 잎을 한아름 묶어서 등에 짊어지고 나를 때면 그 가시에 찔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 참을 만 했다. 그 가시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있다. 취재 당시(1977년) 73살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어저귀(애네켄)가 이렇게 잎사귀가 돋지 않았어요? 그 끝에는 가시가 이 만큼씩 합니다.그 가시에 찔려 눈 머신 어른도 있고 여긴 모두 가시풀이죠. 가죽 신발을 하고 갑바를 치고 그렇게 들어가야 어저귀를 겨우 따요. 풀을 쳐 준다해도. 그 어저귀밭에 나가서 우시는 어른도 많았대요. 숱하게 물에 빠져 죽으신 어른 병들어 죽으신 어른…." 하와이의 이민들은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10시간 정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이민들은 새벽 4시부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 당시 95살 김은순 할머니의 얘기다. "진 종일 나가서 '도스 밀' 말이 그렇지 그게 적습니까? 도스 밀이면 그게 얼마예요. 몇 점(몇 시)에 나가는 줄 알아요? 새벽 3점에 나갑니다. 새벽 3점에 나가서 저녁 4점에 들어옵니다." '도스 밀'이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2천이라는 숫자이다. 에네켄 잎을 따서 가시 없애기를 하루 2천 개씩 했다는 얘기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해도 2천 개를 하기는 어려웠다. 2천 개를 하지 못하면 채찍으로 때렸다. 하와이에서는 농장마다 달라서 채찍질을 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 1세들은 어느 농장이건 채찍질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이도 에네켄 따는 일해 하와이의 농장에서는 어린이들은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달랐다. 2세 동포 당시 72살 고순희 할머니의 회고다. "우리는 오빠하고 같이 농장에 가서 어저귀를 따러 댕겼지요. 저는 어저귀를 훑고 오빠는 어저귀를 따고요. 그때 동생들은 어렸었어요. 그래 동생들이 크니깐 저는 안댕겼지요. 그 대신 동생들이 댕겼습니다." 멕시코로 떠난 이민들은 또 하나 언어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통역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 멕시코인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서러워야만 했다.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이 나라 풍습도 모르고 말을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시키는 사람이 무엇을 시키는지 잘 알 수가 없겠죠 당연히 일을 잘못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엉뚱한 일을 할 수도 있다고요. 시키는 일은 안하고 딴 일을 할 수가 있다고요.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있어서 미움을 받았고 또 매도 맞는 일도 있고…." 멕시코 이민들 중에는 너무도 괴로운 농장일이 싫어서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어김없이 붙잡혀 왔다. 유카탄 반도는 우리 나라 전체보다도 더 넓은 곳이다. 그 곳은 황량하기만한 들 판이다. 가는 곳마다 선인장만 있을 뿐 버려진 땅이었다. 그 곳에서 찾아 나설 길이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멕시코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니 다시 붙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4-04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8] 2세들의 사회진출과 조국관 2

◆이민75주년 외면하는 2세도 1902년 12월22일에 인천항을 떠난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다음해인 1903년 1월 13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78년 1월13일은 초기 이민들이 그곳에 도착한지 꼭 75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와이에서는 이민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 준비에 한창이었다. 하와이 주정부도 이날을 위해서 78년 1월 13일부터 21일까지 1주일 동안을 'KOREAN WEEK' 즉 한국인의 주간으로 공식 선언했다. 한국사람뿐 아니라 많은 외국사람들도 하와이이민 75주년 행사에 스스로 나섰다. 그러나 2세들 중에는 이 일에도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 하와이대 이상억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의 기념행사 때에 어떤 사람을 초청할 일이 있어서 전화통화를 했는데, 제가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75주년행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했더니 ‘아 나는 바쁘니까 다음에 거십시오’하고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관념이 아주 없는 사람들이지요. '나는 관계없다 또 자기 부모들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없고, 어렸을 때 물론 들었겠지만 그 동안 살면서 다 잊어버렸다'는 그런 사람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2세와 최근이민, 교회도 달라 하와이에 있는 한국인 교회는 이민의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왔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그들은 교회를 세웠고 그 곳에서 서러움과 고달픔을 달랬다. 그리고 그 교회는 초기 이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그런데 1969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최근의 이민들이 많아지면서 교회도 구분돼야만 했다. 하와이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송위섭씨의 얘기다. “60년대 이후에 밀려온 이민들과 초기 이민들과는 직접적인 유대관계를 가질 수가 없죠. 그 사람들은 이미 직업면에서, 자녀교육면에서 이런 모든 면에서 완전히 토착화 된 사람들이고 새로운 사람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옛날에 이민 온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와 새로운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등으로 구분이 됩니다.” 초기 이민과 최근의 이민들이 구분돼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현상은 과도기적인 것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언어, 경제기반 달라 융화 안돼 당시 하와이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김호진씨의 설명이다. “사람이 이상도 좋지만 언어가 통하고 서로간에 배짱이 맞고 의기 상통하고 이래돼서 서로 만나 가지고 모임을 함으로써 친목을 도모하게 되는데 언어가 안통하기 때문에 그런 진한 관계가 이뤄지질 않습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기반이 다릅니다. 말하자면 구멍가게 하는 사람과 대기업 하는 사람하고 안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초기 이민 2세들의 조국은 물론 미국이다.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일 뿐이다. 더구나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주 어렸을 때 조금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을 잊고 살아 왔다. 그런데 그 뒤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미국에 밀려 들어왔다. 그 사람들이 왠지 생소했다. 서로 말이 통하질 않았다.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생활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가끔은 한국사람들의 탈선이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됐다. 그럴 때면 수치감도 가졌다. 역시 나는 저와 같은 한국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추리는 어떤 의미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한국인 2세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을 잊었던 사람들도 하나씩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 알고 싶어 찾아 나선 3세 다시 송위섭씨의 얘기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분이에요. 이분이 한 2주일정도 관광단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와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가지고 동서문화센터(하와이대학 부설) 한국학생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당신이 학생회장이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나를 만나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서 만났더니 ‘한 2, 3주정도 한국을 여행하고 오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이다. 나는 3세다. 완전히 미국사람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다. 한국사람을 만나고 싶다. 한국사람을 소개해 달라’ 그래서 물론 한국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고 사람들도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자기가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2세들이 모국을 잊으려한다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민족의 후손들이건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 빨리 적응하고 싶고 그 나라의 국민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국민 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다가 3세 혹은 4세에서 조국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민3, 4세 조국찾아, 한인은 빠른 편 도정일씨의 얘기다. “이민 3세, 4세에 가서 서서히 뿌리를 찾자는 즉 자기의 조상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조상들이 온 나라가 어떻고, 그 사회가 어떻고, 그 문화가 어떤가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 향수,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욕구 이런 것들이 3세, 4세 때부터 나타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뿌리'라고 하는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된 일이 있었다. 이 소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다. 미국의 흑인들은 수백 년을 살면서도 그들의 조상을 찾지를 못했다. 이제야 그들의 조상이 어디에서 왔고 그들의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져 있나를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한국인 후손들은 80년도 안되는 사이에 한국을 찾고 있다. 따라서 아메리카이민 2세들이 한국을 잊었다는데 서운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30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7] 2세들의 사회진출과 조국관 Ⅰ

◇초기이민 4 5세까지 번성 1902년에 인천항을 떠난 한국의 초기 이민들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다. 그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로 떠났던 분들이 있다면 2011년 현재 139살이 됐고 엄마의 등에 업혀 배를 탔던 어린이라 해도 지금 109살이 됐다. 1910년대 남편 될 사람의 사진 한 장을 들고 처녀의 몸으로 태평양을 건넜던 분들도 지금은 100살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그 분들이 낳았던 아이들도 이미 90살을 넘겼다. 그래서 지금 초기 아메리카 이민의 주류는 농장 노동자로 일했던 분들의 손자인 3세 들이다. 물론 노총각으로 오래도록 지내다가 겨우 결혼을 해서 얻은 2세들도 있다. 그들의 나이는 대체로 50살에서 65살까지 어떤 경우는 70살까지도 있다. 초기 아메리카 이민은 벌써 5-6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들은 그 동안의 많은 역경 속에서도 지금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와이는 법조계 진출 뚜렷 하와이대학교 동서 문화센터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던 도정일 씨의 얘기다. "주 정부의 고급 관리직 민간업체의 중역진 법조계 등에 진출해 있는 한인 이민 3 4세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법조계의 이민자녀 진출이 현저하게 눈에 띄고 있는데 하와이대학 법과대학의 한 교수의 얘기에 의하면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한국그룹의 하와이 법조계 지배가 거의 눈에 보일 것 같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미국사회에서 법조계에 진출한다는 것은 다음에 정치계에 진출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상당수의 미국 정치인들이 그 이전에 법조계에 있었다는 통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노예와 같았던 노동을 하면서도 자식은 교육을 시켰고 그래서 너만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바랐던 초기 이민들 그들의 소박한 바람이 실현될 날도 멀지는 않은 것 같다.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의 후손들도 그만한 수준에서 떨어지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김우송씨의 설명이다. "아시다시피 한인 이민 1세들은 정착하시느라고 고생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노예와 같은 노동을 하셨는데 그러나 2세들은 중류급 이상의 직장을 갖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정부기관 또는 정부관련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사업가.의사 배출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초기 이민 2세들은 미국의 그들보다는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하와이 농장의 후손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인지 그들은 일찍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방면에서 성공했다. 티우아나에서 살고 있는 김경우씨의 얘기다. "양화점 한국에서는 구두를 만드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공장에서 만든 구두를 파는 그런 양화점을 큰 규모로 하고 있고 식료품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을 하시는 분도 있고 또 식료품을 파는 대형 수퍼마켓을 하다가 이제는 수입상이 돼서 마켓에 물건을 공급 해주는 대형 업소를 운영하시는 분 그리고 호텔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의사가 두 명이 있는데 다른 곳에 한 분이 있어서 여기서 난 자손 중에서 의사가 된 분은 통틀어 모두 3명입니다. 또 전자제품을 수입해서 파는 그런 비즈니스도 있고 .....그런 정도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우리 이민들은 2세라고 하는 표현을 초기 이민들의 후손인 2세와 3세 4세를 모두 합해서 통칭으로 쓰고 있다. 이런 표현은 미국에 지금도 이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편의상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최근 몇 년 동안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을 1세라고 부르고 있다. 다만 초기 이민이라는 단서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아메리카 이민 1세라고 하면 최근에 이민을 떠난 사람들을 가리키고 초기이민 1세라고 하면 농장 노동자로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직은 최근 이민의 2세들이 성장하지 않고 있어서 초기 이민들의 후손을 구별 없이 2세라고 부르고 있다. ◇2세들 90년대 1세들과 갈등 2세와 최근의 이민들 그들은 묘한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시 하와이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이재영군의 설명이다. "아무래도 미국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모든 것들을 미국식으로 하기 마련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의 한국식의 보수적인 생각과는 판이하기 때문에 같은 김씨고 이씨라도 동질감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하와이대학에 가면 2세들이 많거든요. 한국인 2세니깐 반갑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좀 피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우리는 친밀감을 느끼는데 그 애들은 그런 느낌을 안 갖는 것 같애요." 같은 김씨이고 같은 이씨이고 그리고 같은 혈통이면서도 대화가 없다는 얘기는 서글픈 얘기다. 살아온 바탕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도 서글픈 일이다. 그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위직인데도 한인 밝히기 꺼려 하와이대 동서 문화센터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박윤제씨의 얘기다. "시 정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인데 여기를 방문한 한 한국교수와 친한 사이여서 어느날 같이 식당에 갔다고 그래요. 고급 식당이었던 모양인데 웨이트레스가 음식을 갖고와서 그 교수에게 친근감 있게 일본사람이냐고 묻자 이 교수는 '나는 한국 사람이다'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앞에 앉아 있던 그분이 얼른 '이 사람은 여기 사람이다 그런 것 따지지 말라'면서 무안하게 해서 쫓아버린뒤 이런데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괜히 대접도 못 받는다고 얘기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도 식당에 가서 웨이트레스 앞에서 그런 것을 나타내려하지 않는다니 그밑으로 내려가면 더 심하게 나타나지 않겠는가…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2세들 모두가 한국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2세들도 많다. 그러나 편의상 한국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와이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김하영씨의 얘기다. "지금 여기 2세들을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애국적인 정신으로 나는 한국인의 '피'를 가졌다면서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애국하시는 분들이 있고 그런가 하면 그 반면에 영사관에서 파티를 하면 거기에 참석해서 그럴 때는 한국사람이고 신문에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는 나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나는 미국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28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6] 초기이민자 자녀교육2

◆멕시코이민 겨우 초등학교 졸업 멕시코로 떠났던 초기 이민은 하와이의 이민보다 더 불행했다. 출발에서부터 그들은 불법 이민이었고 애네켄(어저귀) 밭의 일 자체가 고달팠다. 그리고 임금도 너무 저렴했다. 하와이 이민들이 하루 69센트를 받았을 때 그들은 25센트씩 받았다. 그래서 쉽사리 터전을 잡을 길이 없었다. 4년 간의 노동계약이 끝났을 때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농장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임금을 받을 길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다. 이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시 저 농장이 좋다고 해서 그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또 다른 곳으로 옮겼다. 또 옮겼다. 그러나 옮기는 것으로 나은 생활이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녀교육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고 옮기느라고 학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의 멕시코는 미국처럼 좋은 교육제도를 가진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녀들에게 최소한 한국말과 글은 가르쳤다. ◆악조건 속에 한글만은 가르쳐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살고 있는 2세 동포 현오목할머니의 얘기다. "나는 학교도 못 댕겼어요 집안 살림살이 하느라고요. 이리 저리 농장을 옮기는데 1년은 머물러 있어야지 공부를 하지요. 일곱달 다섯달 여섯달 석달…. 한 농장에서는 2주일 있다가 떠나서 이름도 모르고 그냥 나왔어요. '농장에 가서 아버지 거들어 드리고 어머니 거들어 드려야 할 테니까 학교에 가서 공부할 형편이 못된다. 좋긴 좋지만…' 그리고는 농장에서 글을 아시는 분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서 언문(한글)을 가르치셨어요. 가갸 거겨… 그것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완전히 습득했어요. 그래서 나는 한문은 한 자도 몰라요." 멕시코의 2세 동포들 중에서 그런 가운데서도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학교 졸업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것이 한이 됐다고 했다. 티우아나의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처음에 온 사람들(멕시코 초기 이민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교육시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농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도 안 보내고 그냥 그렇게 지냈습니다. 부모 복이 없어서 공부를 자기들이 못했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한 서린 얘기입니다. 그때 온 사람들의 자녀들 중에 공부를 마쳤다고 한다면 그저 국민학교를 마친 정도로 이 나라 글을 보고 쓰고 읽고…. 그 정도 이상은 거의 없습니다." ◆하와이 2세들은 전문직 진출 하와이 초기 이민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집념은 헛되지 않았다. 2세들 모두가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들은 백인을 누르고 좋은 성적을 얻었다. 도라 킴여사의 얘기 다시 들어본다. "미국에서는 교육비가 들지 않는 무료교육이기 때문에 다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한국학생들이 특히 공부를 잘 했습니다. 성적이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1 2등을 다투는 한인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동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오래 계속됐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도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교육에는 차별이 없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동양인이건 어린이라면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은 숫자였지만 정부기관에서는 모집에 차별이 없었다. 도라 킴여사도 주 정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왔다. "정부 일은 그때도 인종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정부기관에 들어갔습니다. 직업을 알선해주는 부서인데 지금 2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77년 당시의 일이다)" 아메리카의 동포 2세들 대부분은 남의 도움 없이 해낼 수 있는 상업이나 변호사 그리고 의사와 같은 자유직업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모집에 차별이 없었던 관공서나 정부기업체의 직원도 많다. 동양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피해서 찾아 나선 직업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비록 장사를 해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 못지 않게 잘 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이다. 그러나 그 밑 바닥에는 노동자로 머나먼 타국에 건너가서 먹을 것을 못 먹었고 입을 것을 못 입었고 그러면서도 내 자식들만은 가르쳐야겠다는 1세 동포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한인 2세 인종별 소득 최고 전 하와이대학교 이상억교수의 얘기다. "얼마 전에 주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2세가 1인당 소득이 제일 많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77년 당시도 그랬다) 그것은 백인이나 일본사람 그리고 중국인을 포함한 것인데 그들 중에서 제일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효는 많지 않지만 직업적으로 가령 건축가 라든지 학교 선생님들 또 의사 변호사 등 수입이 많은 전문직종 종사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구 비율로 볼 때 한인들의 전문직 진출 비율이 높습니다. 그럼 왜 이러느냐? 역시 그 부모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강조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부모님들이 여기 와서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면서 하루 69전밖에 못 받았지만 그 돈을 가지고 애국운동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교육에 썼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들 끼리 학교도 설립했습니다. 또 자기들은 바느질을 한다 빨래를 한다 하지만 자손들은 대학까지 다 졸업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자라서 이제 다 쟁쟁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23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5] 초기이민자 자녀교육

◇한인학생수가 제일 많아 1933년도의 하와이 이민국 교육자료를 보면 동양인 학생 중에서 31%가 한국계 학생이었고 30%는 일본계 학생 24%는 중국계 학생 그리고 필리핀계 학생이 8%였다. 그보다 5년 전인 1928년 인구조사표를 보면 하와이 인구 35만명 중에서 일본사람이 13만4천명으로 가장 많고 필리핀 사람이 6만명 중국사람이 2만5천명 그리고 한국 사람은 불과 6천3백18명이었다. 6천명의 한국 사람이 13만 명의 일본사람들보다 더 많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낸 것이다. 물론 6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보다도 2만5천명의 중국인들보다도 훨씬 많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얘기다. 당시의 우리 초기 이민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잘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초기 이민들은 그때도 농장의 노동자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당시 아이들과 함께 농장에서 일을 했다. 식구 모두가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조금은 윤택하게 그날 그날의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달랐다. ◇부모고생 … '공부만 열심히 해라'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에서 '내가 이렇게 노동을 해야만 했던 것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녀들만은 농장에서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어도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지도 않았다. 행여나 그것 때문에 공부에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2세 동포 도라 김 여사의 설명이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있었지요. 그때는 미국 전체에 일자리가 없어서 백인들도 굉장히 어려웠었어요. 우리 부모들은 정말 고생을 할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 어려서 잘은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 짐작이 되고도 남아요. 그런데 우리들한테는 그런 얘기를 별로 한 일이 없었어요. 부모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너희들은 그저 공부만 해라 우리처럼 이렇게 고생 안하게….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한국의 초기 이민들은 아메리카에 건너가면서부터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자격 있는 선생님이 있었을 리 없었다. 무엇을 가르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요즘처럼 교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교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글 잘 아는 사람 선생님으로 가르칠 선생님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남들과 다름없이 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수고한 대가를 줘야겠지만 줄 것도 없었고 받으려하지도 않았다. 움막같은 집이어서 방 하나를 교실로 내어주면 그 집 식구들은 밖에 나가 밤하늘 만 쳐다봐야 했다. 하루 종일 농장에서 일하고 돌아 온 터이니 밀려오는 졸음을 주체 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육을 시켰다. 한국 글을 가르쳤고 한국말을 가르쳤다. ◇2세 동포들의 얘기다 "농장에서 한국 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을 추려서 교사로 뽑지요. 한국정신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그래서 농장마다 교회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 사람들(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었지요. 옛날 식이어서 국어(한글)하고 한문을 섞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자문부터 배웠습니다." 초기의 아메리카 이민은 미국에서 살았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도 미국에 동화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여자들은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보다도 더 한국적 이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밥짓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수놓는 것 배우고 뜨개질 배우고 그런 것들 모두 다 배웠어요. 한국에서 어머니가 했던 것을 그대로 배웠지요." 동포 2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린이들은 언어의 장벽이 없다. 며칠 동안만 외국의 어린이들과 어울리면 그 나라말에 익숙해진다.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놀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들의 말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부모들은 한국말을 한다. 그래서 한국말을 알아듣게 된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할 줄은 모른다. 어린이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동화된다. 말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문명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더구나 그들은 부모의 조국을 본 일도 없다. 봤다 하더라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국을 심어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의 초기 이민들은 훌륭하게 이 일을 해냈다. ◇한국말로 안하면 대답도 안해 멕시코 이민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쿠바로 옮겨 그곳에서 자란 2세 동포 77년 당시 73살이었던 김마리아 할머니의 설명이다. "7살 때부터 글방을 댕겼어요. 갔다가 오면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스패니시로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못들은 것처럼 대답을 안 하셔요. 그러면 '엄마는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었느냐'고 다시 묻지요 그때 엄마는 '나는 스패니시는 모른다 네가 한국말을 해야 알아듣지 스패니시로 하면 못 알아듣는다. 나는 멕시칸이 아니야'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집안에서는 모두 한국말을 사용했습니다." 초기 이민들이 세웠던 교회는 2세들의 한글 교육에 많은 공헌을 했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져서 미국에 있는 큰 교회는 2세들의 한글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이면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한국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다. 아메리카 이민 1백년사에서 교회가 가지는 비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높이 평가 해 야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초기 이민교회는 교육과 계몽활동에 앞장을 섰다. 어떤 의미에서 아메리카 이민 1백년은 교회를 바탕으로 해서 이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안정송 할머니의 얘기다. "일리아 스트릿에 있는 이승만 박사가 세웠던 교회에 국어 학교가 있었고 또 감리 교회에 국어학교가 있었고 박용만 씨가 창설했던 독립단에도 국어학교가 있었고 촌에 있는 농장에도 교회가 있는 곳마다 국어학교가 있었습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21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4]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2

◆가슴 아픈 독립단체의 분열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의 생활을 취재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독립단체의 분열이었다. 서로 싸워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해야만 했던 초기 이민들의 생활은 부끄럽기만 했다. "회관에 모이면 왜 그렇게 싸움부터 하는지…. '그 왜 회관에 모이세요? 싸울 것 같으면…' 하고 아버지한테 그렇게 얘기하죠. 그런데 나중에 또 싸우고 헤어져요. 왜 그랬는지…." "하와이 섬의 힐로를 갔는데 양쪽 사람들끼리 서로 손잡고 인사만 해도 벌금을 물더라구요. 그러니 얼마나 심했어요."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크게 봐서 두개의 부류로 갈라져 있었다.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의 '국민회'와 '동지회'라는 소속감으로 분류되었다. 세월이 흐르니 물론 예전처럼 싸우려 들지는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단 한가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구분은 아직(1977년)도 뚜렷했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97살 도진호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이 박사는 원래 성격이 자기 주장이니까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옳지 못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는 등 시비를 가리는 사람은 그만 두게 해요. 그런 까닭에 이 박사를 따르는 이들은 동지회로 나서고 그러치 못한 이들은 안창호씨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에서 활동했지요. 그렇게 갈라져 가지고 그 뒤에는 합의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분열 아니라 '접근방식 달라' 1902년 하와이 초기 이민 제1진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들어 가던 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2년 뒤인 1904년에는 이승만이 호놀룰루를 거쳐 워싱턴 DC로 갔다.그리고 같은 해 박용만은 네브라스카 주로 건너갔다. 이들은 모두 미국 유학생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들은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적 인물이 됐고 독립운동의 기수가 됐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 명제 아래서 이들은 뭉쳤다. 그러나 독립을 찾으려는 방향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분열'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여생을 보냈던 당시 89살 송철씨의 얘기다. "박용만 이라고 하는 이는 하와이에서 왜놈들을 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군단을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고 또 여기 도산 안창호씨는 인재를 길러서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해서 흥사단을 조직하는 일이 그이의 목적이었고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처음부터 왜놈들이 세계5대 강국의 하나인데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겠는가. 따라서 방법은 다른 5대강국의 동정을 얻어 가지고 일본을 때려눕히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지. 그래서 그분은 외교를 내세웠고 그것이 그의 기본 정책이야." ◆독립 기치 아래서는 모두 단결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크게 봐서 동지회와 국민회 소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보다 많은 단체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의 단체도 있었다. 하나의 단체가 있었다 해도 서로 뜻을 같이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또 나눠지는 예도 있었다. 물론 그 많은 단체가 모두 다 독립단체는 아니었다. 어떤 것은 친목을 목적으로 했다. 어떤 것은 상부상조와 교육장려를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된 점이 있다. 배일감정 즉 일본을 싫어했고 직접 선두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국독립이라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어제까지 싸웠던 사람들도 오늘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필요가 있을 때는 뭉쳤다. 그리고 또 하나 외롭고 서러운 백성들이라는 공동의식은 버리지 않았다. 다시 이상억 교수의 얘기다. "우리가 볼 때에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라든지 그 반대 당인 국민회라든지 다 애국심은 강해요. 독립이라면 핏대를 내고 그럴 정도로 강해요. 서로 개인 감정으로 대립하는 일은 많지 않아요. 또 그렇게 서로 다른 단체로 갈라졌어도 동지회든지 국민회든지 사람이 죽으면 그 장의사에는 그전에 알던 사람은 모두 다 와서 조문하면서 같이 슬퍼하는 것을 봤습니다. 자기네들이 같은 대한민족이라는 데는 조금도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독립단체 실제 권익 위해 활동 시원찮게 대했겠지만 주미 일본대사는 그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미명아래 한국인들을 자국민으로 간주했다. 초기 이민들은 싫었어도 필요한 때는 일본대사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나라가 일본의 영토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1948년 정부 수립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국민이었다. 그래서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사람들과 똑같이 감시 받고 집단 수용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 초기 이민들은 우리는 일본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때도 독립단체들은 한데 뭉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김기열 할머니의 얘기다. "우리도 영락없이 일본사람과 같이 잡아 갇힐 형편이 꼭 됐었습니다. 이러니 우리는 어데 가서 호소할 데가 없었어요. 우리가 무슨 영사가 있었소 대사가 있었소.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모모한 지사들이 모여서 우리 한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얘기 해 가지고 중앙정부에다가 청원을 했지요. '우리 한인을 일본인 취급하지 말아라'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 한인들은 뽑아져 나왔지요." 초기 아메리카 이민들의 정신적인 지도는 독립단체에서 맡아 해왔다. 그리고 실질적인 권익 옹호도 독립단체에서 해왔다. 독립단체는 국가였고 대사관이었고 영사관이었다. 한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면 항상 그들을 위해 싸웠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분열돼서 싸웠다하더라도 그 공헌을 망각할 수는 없다.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다. 왜 그들이 서로 나뉘어서 미워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도 이미 늦은 것 같다. 다만 그들은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면서 싸워온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고 덮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09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3]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1

◇일본 영사관도 안가 우리 한민족을 은근과 끈기가 있는 민족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참고 견디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4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도 은근과 끈기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사람을 좋아해도 은근히 좋아하고 오래 좋아한다. 그래서 좋은 것도 겉으로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은근히 싫어하고 끝까지 미워한다.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일본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한 것도 그런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조국이 남의 나라가 됐다 하더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다. 지배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 해도 고향산천은 내 것이기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미워서 가질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일본 간장 구입도 안해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이순도 할머니의 설명이다. "한국을 가고 싶어도 일본 영사관에 가서 수속을 해야 하니까 그것을 꺼려했습니다. 일본사람들 한테 가서 구구하게 하는 것은 싫다는 거예요 뭐든지. 우리는 이민 올적에 당당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왔는데 왜 그걸 가지고 거기에 가서 굴해야 하느냐 그래서 못 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구의 반대편에 가서도 김치를 찾는다. 콩이 없는 곳에 가서도 간장 된장을 찾는다. 미국이 넓은 나라이지만 간장이나 된장을 구하기란 힘든 일이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싫어한다. 그래서 더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은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다. 그러나 왠지 일본사람들에게서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은근히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맛이 없어도 청국(중국) 간장을 사서 먹었다. ◇일본인 구타하며 분풀이 일본이 내 조국을 빼앗았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미웠다. 힘이 없어서 당장 조국을 독립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혼을 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 중에서 아니꼬운 녀석이 있으면 한번씩 때렸다. 초기 아메리카 한인 이민의 상당수가 해산된 광무군(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실력이 있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무술을 익혔던 것이다. 그 실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양주은 옹의 주장이다. "일본사람들이 그때 시절에는 원수니까 일본사람과 맞부딪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 조져댔거든.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사람을 잘 친다면서 그 사람들과 맞서지 말라고 저희들끼리 권고하고 주의를 주고 그랬단 말이야. 왜 그러냐 하면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서울에서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택견을 하는 거야. 두발로 이마를 차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일본사람을 치면 한사람이 일본사람 열 스물을 쳐.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아이고 한국사람 말도 말라고 사람 잘 친다고.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한테 달려들지를 못했어." 일본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멕시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의 한국인들은 보다 대담하게 행동했다. ◇멕시코 일본대사 구타사건 어느 날인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노동자들을 갑자기 집합시켰다. 그리고 멕시코 경찰이 어떤 동양 사람을 소개했다. 그 다음 얘기는 티후아나의 김경우씨로부터 들어본다. "멕시코 경찰이 발표를 하는데 일본대사가 왔다. 이름은 누군지 모릅니다. 왔는데 너희 한국사람들한테 할말이 있어서 모인 것이라고 그렇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한국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사람들을 증오하는 마음이 꽉 들어 차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일본 대사가 왔다 그러니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돼 있었겠죠. 그런데 일본 대사가 단위에 올라가서 얘기를 하는데 멕시코 사람이 통역을 했다고 그래요. 그 통역 얘기를 들으니까 이제 한국사람은 일본 사람이 됐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합해서 한국 땅이 일본 땅이 됐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일본사람 치하에서 일본 국민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멕시코에 온 대사니까 앞으로는 당신들의 모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그러자 그 자리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분이 넘쳐 가지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다가 단에 올라가서 일본대사를 구타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이 구속된 것은 물론이다. ◇대한제국 언어 그대로 사용 동포 1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말을 몰라서 대화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단어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출발한 시기가 1세기 전이어서 언어의 시대 차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사람들에게 나라는 빼앗겼지만 나는 고종황제를 모셨던 한민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 잊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지켜왔다고 해야 옳다. 피곤했지만 밤이면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한국어를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지금 너의 조국은 일본 놈들이 다스리고 있다'고 가르쳤다. '일본 놈들이 한국말을 없애려고 한다'는 얘기도 가르쳤다. '그래서 너의 조국은 일본말을 쓰고 있을 것이다'고 가르쳤다. '아직 한국말이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순수한 한국말은 아닐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고국을 떠났던 1900년대 초 고종황제 때 쓰고 있었던 말들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갔다. 1947년에 미국에 건너온 전 하와이대학교 이상억 교수의 얘기다. "수병이라고 하면 모릅니다. 물 병정이라고 해야하고요 또 공장은 기계창 이라고 하고요 소방서하면 그것은 불 기계창이 되고요 순경은 순사고요 비행기는 공기선이 되고요 변소는 뒷간이라야 되고 또 레코드 판을 유성기 판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레코드판을 틀었더니 '왜 일본 음악을 트느냐?' 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떠날 때는 그런 신식 유행가가 없었고 그후에 나타났으니까 그분들은 그것을 일본 음악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 음악 틀지 말라고 아주 좋지 않은 기분으로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07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2] 독립자금모금2…"독립선언 33인 가족부터 돕자" 부인들도 열성

◆ 독립선언 33인 가족 위해 모금 독립운동에는 부인들도 열성으로 참여했다. 남편이 참여하기 때문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남편의 나라가 바로 내 나라였다. 더구나 그들은 사진 혼인으로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다. 일본의 발악적인 만행을 직접 눈으로 봤고 또 일부는 그것이 싫어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하와이 부인회는 1913년에 '대한인 부인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이 되었어요. 그때는 그저 여기에 한인이 사니까 부인회를 조직했는데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했고 자녀교육 권장하는 것, 장려하는 것 또 교회 및 사회 도와주는 것 그런 일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1919년이죠? 삼일독립 선언한 그 소식을 전보로 받고는 4월 7일에 모였습니다. 그때 공동대회로 모였습니다. 각 지방에 계신 부인들이 41명이 모여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조국에서는 독립선언이 선포됐는데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느냐? 그때 우리 생각에 33인은 모두 잡혀가서 곤경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선 그 가족부터 구제를 하자 그래서 거기서 모금을 해서 1천5백 달러를 먼저 보냈어요.” ◆ 노름방에서도 독립자금 모아 하와이의 초기 이민들은 4개의 섬에 흩어져 있는 각개의 농장에서 일을 했다. 한개의 농장에는 많으면 4-50여명 적게는 한 두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독립자금을 거두러 다니는 사람은 이 섬, 저 섬을 건너면서 이 농장 저 농장을 찾아야 했다. 어렵게 찾아가 보면 이미 다른 농장으로 옮겨 버린 일도 있었다. 어떤 때는 일터에 나가고 없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농장을 찾기도 힘들었다. 시내에 사는 사람의 경우는 더 어려웠다. 일터가 어딘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어느 곳이었건 주저하지 않고 있는 대로 바쳤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있었던 송철씨의 얘기다. “광복 사업을 위해 돈을 거두러 돌아다닐 때 일하는 영감님들을 만나려면 먼 시골의 일하는 데를 직접 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타운에서는 청국인(중국인)들의 노름방에 가면 그분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시골 농장에서 돈을 벌면 노름방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을 만나려면 노름방에 가야했습니다. 그 노름방에 가서 영감님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자기네 돈을 있는 대로 털어 주어요.” 노름하는 곳에서는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돈을 빌려주면 돈을 잃게 된다는 그들 나름의 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쳤다. 주머니에 있는 대로 털어서 바쳤다. 어쩌다 타락해서 노름을 하고 있을 망정 나라마저 잊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본국·멕시코동포 구제도 모금 아메리카의 이민들은 낯선 땅에서 눈물겨운 고생을 했어도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본국의 동포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와이의 동포들은 멕시코의 동포들 보다는 생활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독립자금에서 여유가 생길 때면 본국 구제금으로 돌렸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애국단 회장직을 맡았던 이화목씨로부터 애국단이 모금했던 기금 사용 내역을 들어본다. “상해 임시 정부 1천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에 3백 달러, 광복 위로금으로 임시정부에 5백 달러, 구미위원부의 군축 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 식자비로 5백 달러, 북간도 동포 구제금으로 67달러,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송미령 여사(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의 부인)에게 군사 위로금으로 3백70달러, 멕시코 동포 하바나로 이민할 때 동정금으로 40달러, 쿠바 동포 구제금으로 55달러, 본국의 이재민 구제금으로 1백72달러, 본국 수재기금으로 각각 3백68달러와 2백72달러, 본국의 소년갱생 운동에 보태 쓰라고 송정현 여사에게 55달러, 황은순 고아원에 58달러, 장해숙, 이한나에게 2백67달러, 2차 대전 중 미국 적십자사에 5백75달러…” ◆ 나라 없는 한에 맺혀 조국사랑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저 감상적인 충성은 아니다. 그들만이 느껴야했던 비참한 운명에 수없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라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정말 한국에 있는 그 사람들은 나라 없는 한을 그렇게는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끔 느끼게 됩니다. ‘나라가 없어서 이렇구나,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어디 여행을 갔다 오더라도 우리를 일본사람 맨 뒤에다 세운 다고요. 그런 것을 당할 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아파요? 여기서 특히 약한 민족으로 있으니깐 나라 없는 것을 더 느끼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구나 멕시코의 한국인들은 노동계약이 끝나는 해에 한일 합병소식을 들었다. ◆ 한일합병 소식, 갈곳 잃고 주저 않아 “본래 우리 1세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4년 기간을 마친 뒤 거의 다가 다시 서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고요. 헌데 합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주저앉았어요.” 나라가 없어졌는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무섭게 내려 쪼이는 햇볕 아래서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참고 노동을 할 때, 조국은 독립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란 고향하늘,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이 생각 날 때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를 때도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양사람에게는 집도 팔 수없다고 거절당했을 때 조국은 독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머니를 털었다. 그 돈이 독립에 쓰여진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다. 나라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단순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독립에 돈을 바친다는 그것이 그들의 보람이었고 인생의 전부였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3-02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1] 이민자들 독립자금

◇독립자금이라면 아낌없이 바쳐 하와이나 멕시코로 떠난 초기 한국인들은 교육 수준이 낮았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60%이상이 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자들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농부를 모집해서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 수준이 낮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나와 직접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은 형용할 수 없는 가난함 속에서도 싫다하지 않고 아낌없이 독립 자금을 바쳤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친 돈이 없었다면 독립운동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먹는 것도 애국지사 위해 참아 양주은 옹의 얘기다.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된 뒤에는 북간도 서간도 등 각처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이 상해로 모두 몰려들었거든. 그 사람들 중에는 임시정부 요원 이외에 학생들도 있었는데 군인 등을 포함해서 800여명이나 됐단 말이야. 그 당시 중국 땅에서는 중국사람들의 형편도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밥한 술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었지. 또 우리 나라에서는 돈을 보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왜놈들이 알면 목을 베거든. 그러니 돈 나갈 데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렇다고 여기 하와이에 재벌들이 있었나? 그저 월급인데 그 중에서 성심으로 얼마씩 보내주었지."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 때문이었고 이승만 박사가 각국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 때문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인재를 기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들 때문이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세계를 누빌 때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피나는 노동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끼니까지도 넘겼다. 먹고 싶은 것도 참았다. ◇매주 사흘 고기 안먹고 돈 모아 "애국단원은 한 주일에 두 날은 일본사람들의 간장을 안 먹기로 하고 또 3일은 고기 안 먹는 날로 해서 돈을 모은 것으로 상해임시정부에 1000 달러를 보냈습니다." 하와이의 초기 이민들보다 더 악조건 속에서 일한 사람들이 있다.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곳은 날씨부터가 달랐다. 낮에는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일해야 했다. 그렇다고 하와이보다 많은 임금을 받은 것도 아니다. 훨씬이라고 표현 할 만큼 적은 돈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도 독립 자금을 냈다. 멕시코 시티에서 살고 있었던 최병덕씨(77년 당시 72세)와 티후아나에서 살고 있는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월연금 매달마다 내는 세금이죠. 매달 몇 푼씩 내서 미국으로 보내고 메리다 지방회에 세금도 내고 또 학교가 있었습니다. 동포들이 학교를 창립했죠. 그 비용도 냈습니다." "그때 거기 낸 영수증 하나를 봤는데 미국 돈으로 5달러 짜리였습니다. 그 당시 5달러 라면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때 멕시코 에네켄(어저귀) 농장에서 일했던 초기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돈은 정말 엄청난 돈이었을 것입니다." ◇자금 250만불 현 5000만달러 한일합병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의 한인 이민들은 무려 2백 50여만 달러(김원용은 3백만 달러라고 주장했다)라는 거액을 독립자금으로 바쳤다. 그 동안의 물가상승률 20배를 고려하면 5000만 달러라는 거액이 된다. 물론 이런 돈이 일시에 모아진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번씩도 냈고 1년에 한번씩도 냈었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도 냈었다. 그러기를 3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낸 돈 한 푼 두 푼이 모아져 엄청난 돈이 됐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름으로 그런 돈이 모아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안정송 할머니의 설명이다. "우리는 한국에 있었으면 다 죽을 사람이다. 그러니깐 생명 대신에 돈을 바치자. 그런 표어를 내세워 '혈성금'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얼마씩 바치기로 했어요. 그래서 외국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한국사람들은 독립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나마 현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으니깐 내달 월급에서 내가 낼 터이니 이 달에 얼마를 적습니다 하고 그만큼 열성으로 돈을 보냈었습니다." 요즘말로 바꾸면 독립자금을 내기 위해서 가불을 신청한 것이다. 가불해준 농장 주인들의 눈에 한국인은 정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녀석들이 뱃심좋게 살아간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곤 아무런 불평 없이 일하는데 놀랐을 것이다. 독립자금은 '혈성금'만으로 다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인구 세와 같은 방법으로 바친 것도 있었다. ◇혈성금.인두세등 이름 붙여 거둬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95살 도진호 할아버지의 얘기다. "미국에서 POLL TAX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인두세라는 것을 냈어요. 식구가 4명이면 4명 5명이면 5명 그리고 7명이면 7명분씩의 세금을 냈습니다. 하와이의 동포들이 모두 다 이 인두세를 내서 임시정부에 바쳤습니다." 퍽 직설적이고 단순한 이름의 세금이다. 그들은 그런 이름으로 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도 한몫 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름을 내기 위한 한몫은 아니었다. '내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빠질 수 있겠는가' 하는 참여의식에서 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쓰여지는가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하면 어느 때건 바쳤다. 그리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바쳤다. LA에서 살고있었던 이화목씨의 증언이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그렇게 돈을 못 버는데도 돈을 바치는 데는 눈물겨울 정도 였다는 점입니다. 해방이됐다고 해서 국민회에서 6명을 대표로 한국에 보내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서 2만 달러가 걷혔습니다. 저는 그때 한 30여 명밖에 안 모여서 뭐 돈이 나올 수 있을까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 먼데 농장에서 일생을 바친 홀아비들이 몇천 달러씩 있는 대로 다 바칩디다. 그래서 2만 달러를 그 자리에서 모았었어요."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2-28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0] 사진신부 김기열 할머니 (2)

◆시아버지 될 분 직접 찾아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먼길을 왔습니다. 아들 없는 며느리라니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며느리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체면 없이 왔습니다." 말하자면 '사돈의 집'이었다. 그처럼 반대했던 부모들이었지만 그래도 손님 대접을 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형편없이 생긴 시골 영감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양반의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딸애를 불러서 인사까지도 시켰다. 그러나 김기열 할머니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어떤 시골 영감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우리 시아버지의 성명이 박군석씨예요. 이 노인이 전라도 아무 아무군데서 사시는 박군석씨다 나와서 인사해라. 명색이 시아버지지요 내 민적을 그 집에다가 옮겨 놓았으니까. 할 수 있나요. 나가서 인사를 했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그분은 부산에 온 것이 처음이니까 오빠가 안내하면서 한 사날(3-4일) 부산 구경을 시켜드렸지요. 그러더니 아무 날은 간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그때 혼자서 보따리를 쌌지요." ◆ 나는 박씨 시아버지 따라 나서 무척이나 당돌했지만 '나는 이제 김씨가 아니라 박씨의 식구'라는 결심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시집에 가 있어야지 친정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슴도 아팠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이미 결정은 내려진 때였다. 그리고 이제는 처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남의 부인이 됐으니 머리 매무새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머리 참 좋았습니다. 내 구름 같은 머리 따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보따리 싸들고 나는 죽어도 박가네 집에서 죽을 터이니 내 가는 길을 금하지 말라. 따라 나섰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망신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그저 입이 딱 벌어질 일이지요. '저런 세상에 망칙한 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를 말릴 수가 없지요. 그때 내마음이 칼날 같았습니다. 꼭 내가 박씨 집으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는가봐요. 보따리를 내가 들고 나섰으니까요." 부모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제는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언제 볼 지도 모르는 딸을 그냥 보낼 수만은 없었다. 그날 하루 밤만이라도 더 있다 가기를 원했다. 그 날밤 어머니는 딸을 붙들고 울었다. 물론 딸도 울었다. 그래도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그 결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남편 얼굴도 본 일없는 이 신부는 시아버지를 따라 남편의 고향으로 떠났다. ◆ 80리 걸어다니며 수속 마쳐 시가(시댁)에 도착한 김기열 할머니는 그때부터 미국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고된 줄도 모르고 여권을 내기 위해 익숙하지도 못한 시골길을 걸어다녔다. "군청이 순천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주에서 순천까지 80리를 걸어서 군청에 들어가서 모든 수속을 마쳤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사진 결혼으로 미국에 건너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에 들어갔다가 이민국에서 결혼을 했다. "한달 사흘이라던가 나흘이라던가 참 그때 풍파 많았습니다. 한달 넘게 배속에 있다가 도착해서 이민국에서 결혼하고 우리 남편이 워싱턴주 스포켄에서 농사하고 삽디다. 그곳으로 갔지요." 당시 남편의 나이는 35살이었다. 17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가졌지만 그들은 결합됐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 많은 남편을 보고 실망도 했다. 눈물도 흘렸다. 다시 돌아가겠다고도 했다. 돌아가려면 여비를 다시 내 놓아야 한다는 으름장도 들었다. ◆ 지은 죄 많아 '운명'이려니 … 그러나 그 보다 더 그를 못 가게 만든 것은 미국에 오겠다고 기를 쓰며 엮어 놨던 자신의 과거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아버지와 다른 시집식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민 수속을 밟으러 뛰어 다녔던 무주에서 순천까지의 시골길이 생각났다. 그러다 그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참고 살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수록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끝까지 반대했던 부모들에게 잘 못산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이 싫었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서 어머니에게 비단 옷이라도 사다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이라는 사람을 따라 나섰다. ◆ 자식 열명 낳아 잘 키워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그 결심은 모두 실현 됐다. 남들처럼 몇 백만 달러의 재산은 없지만 부러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에 고국에도 4번이나 갔다왔다. 부모님들은 이미 돌아 가셨기에 뵙지는 못했으나 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만났다. 모두가 잘 살고 있었다. 김기열 할머니의 자랑은 고생 속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키워온 자식들이다. "자식 열을 낳았습니다. 4남 6녀가 잘 자랐습니다. 미국을 위해서 일했고. 한국전쟁에도 나갔습니다. 아들 4형제가 모두 한국전 참전용사들 입니다." 김기열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편안히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김기열 할머니의 얘기는 한사람의 생애는 아니다. 당시 사진 결혼을 통해서 들어온 모든 한국여인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회의 모습이었다. 정리= 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2-21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9] 사진신부 김기열 할머니

◆ 사진 맘에 들면 편지왕래 시작 "사진을 보내줄 때 내 주소는 어디며 내 부모의 성명은 누구며 내 나이는 얼마며 내 이름은 누구다라는 내용을 첨부해서 보내 줍니다. 그러면 사진 받는 사람(여자)이 마음에 들면 자기의 주소와 이름 등 인적 사항을 또 보내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부터 편지 내왕을 하지요." 김기열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있었다. 77년 당시 나이 77살 한국나이로 하면 78살이었다. 고향은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모라리였다. 남편의 이름은 박술씨. 그래서 미국식으로는 박기열이라고 부른다. 남편 박술씨는 대구 출생이었으나 전 가족이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지리로 이사를 했다. ◆ 13세때 사진받고 마음 굳혀 김기열 할머니가 사진 혼인으로 미국에 온 것은 1918년 그때 그의 나이는 18살 이었다. 김 할머니는 그보다 5년 전인 13살 때 중매에 나선 동리 할머니의 유혹을 받았었다. "미국에서 장가 갈 사람들이 있다는데 너희들 혹 미국 갈 생각이 있느냐? 그럴 생각이 있으면 여기 사진이 있으니까 결혼을 하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할머니의 여러가지 얘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니 이것 참 미국이라는 데가 좋구나. 우리 부모네들이 항상 시집살이가 어렵다고 그러는데 야 이거 시집살이도 안하고 좋겠구나. 그럼 한번 가 보자. 이렇게 돼서 우리도 사진을 찍어서 그 할머니한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또 우리들 사진을 미국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보내 줍니다. 그러면 자기네들도 사진을 보고 고르지요." ◆ 미국은 시집살이 없는 낙원 소꿉시절부터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라 온 김기열 할머니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기선을 보면서 저 먼 곳에 어떤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그는 그곳에는 시집살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때 시집살이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동리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미국이라는 곳에는 시집 살이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시집살이가 없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갑자기 어렸을 때의 그 정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갈 것을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그 의향을 전했다. ◆ 부모반대에 오히려 혼인 결심 "우리 부모님들은 물론 죽인다 살린다 했지요. 그런데 나는 친정 집의 부모가 너무 그러니까 마음에 배심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살수가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듭디다." 일종의 반발 의식이었을 것이다. 부모들이 반대를 하면 할수록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사명감과도 같은 의지를 가졌다. 5남매의 막내딸 기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만큼 귀엽고 사랑스런 딸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들은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망 밖이지요. 저년을 약사발을 안겨서 죽였으면 죽였지 그렇게는 안하겠다는 거예요. 남편을 보았소? 또 미국이라는 데가 어데요? 이거 다 모르는 구식 노인들이에요. 그때 우리 집 굉장히 완고했어요. 그래서 여자가 그런데로 (미국) 가면 집안 망신이 되네 부모한테 제일 큰 망신이 되네…. 뭐 별 별 얘기들이 많았어요" ◆ 오빠 도움으로 준비 수속 안되는 일을 해내려면 반드시 공모자가 있어야 한다. 이해하고 협조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김기열 할머니는 그때 오빠를 생각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사실을 얘기했다. "오빠가 말하기를 '내가 미국에 가라는 말은 안한다. 그때 시절에 미국에 간 사람들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사람들은 아마 안 갔을 꺼다. 난봉 난봉 하다가 난봉이 진한 사람들이 미국에 갔을 것이다. 가서 미국의 문명을 배워 깨달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느냐 나쁜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의 행복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지금도 오빠의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오빠는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개화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오빠도 미국으로 이민 떠난 사람들을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빠가 그렇게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얘기들이 정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한 장으로 남편될 사람을 다 평가할 수도 없었다. 중매하는 할머니의 얘기가 모두 사실일 수만은 없다. 그래서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오빠는 사명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 한국 신여성들도 미국으로 좀 나가야 한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처럼 조그마한 하늘만 쳐다보고 그래서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 네가 가기를 원하면 내가 주선해주마." 오빠의 허락을 받은 그는 부모 몰래 사전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요즘 얘기대로 초청장을 받는 수속을 했던 것이다. ◆ 미국 비자 받으려 호적도 옮겨 "내 민적(호적)이 남편의 집에 있어야 미국 입국 비자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시가 댁으로 민적을 옮긴 뒤에 남편될 사람이 미국 정부에다가 이 사람은 내 부인이다. 내가 데리고 살아야겠다. 그러니 비자를 달라 이렇게 요구를 하지요." 모든 수속을 오빠가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빨리 미국으로 갈 것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에서만 봤던 남편을 생각했다. 밤이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수속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시가(媤家)에 편지를 띄웠다. "내가 밤에 그 국문 몇 자 배웠던 것을 가지고 우리 시가 집에다 편지를 했지요. 전라도에다가 편지를 했더니 우리 시아버지가 우리 친정 집으로 왔어요. 그때 철로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걸어서 또 어쩌다가 마차를 얻어 타면서 그렇게 온 것이지요" 시아버지 될 분도 편지를 보고 놀랐었던 것 같았다. ☞◆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하와이이민다큐멘터리<10>편은 2월22일자 (화)에 게재된다. ▶책구입문의: (213)820-8550 정리=천문권기자 cmkn@koreadaily.com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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